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단지 주름이 늘고 머리가 희어지는 일만은 아니다. 어떤 날은 자신이 했던 말을 까먹고,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던 시간조차 기억나지 않을 때면 불현듯 공포가 스쳐간다. 혹시 나도 치매가 시작되는 건 아닐까? 이런 마음으로 "알츠하이머를 부탁해"를 펼쳤고, 책을 읽는 내내 마음 깊은 곳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 책은 단지 치매라는 병을 다룬 소설이 아니다. 삶의 중심을 지탱하던 기억들이 사라질 때,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을까? 그 질문 앞에 선 한 여성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이 글을 읽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특히 내 나이쯤 되면 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언젠가는 나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감이 들었다.
기억이 흐려지는 순간, 나는 어디까지 나일 수 있을까
소설 속 주인공 앨리스는 하버드대학에서 언어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지적이고 활달한 중년 여성이다. 그녀는 늘 명확한 언어와 논리로 사람들을 설득해 왔고, 가정에서도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그저 피곤해서, 혹은 나이가 들어서일 거라 넘기지만, 잦은 건망증과 길을 잃는 일이 반복되면서 검사를 받게 된다. 그리고 결국 앨리스는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을 받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책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 역시 요즘 들어 자꾸 이름이 헷갈리고, 예전처럼 단어가 술술 나오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이 탓이겠지” 하며 웃어넘겼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불안이 있었다. 앨리스의 이야기는 그런 내 불안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했다.
이 책의 진짜 두려움은, 병의 진행이 아니라 그 병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앨리스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를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단지 과거를 잊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과 연결된 모든 것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녀가 무너져가는 과정을 보면서, 나도 언젠가 이렇게 될 수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현실처럼 다가왔다.
알츠하이머는 혼자만의 병이 아니다 – 함께 살아가는 가족의 아픔
앨리스의 병이 진행되면서, 그녀만 고통받는 것이 아니다. 가족 모두가 그 변화에 혼란을 겪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아픔을 표현한다. 남편은 애써 현실을 외면하려 하고, 자녀들은 엄마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 각기 다른 속도로 적응해 간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의 가족을 비춰보는 거울 같았다.
내가 병을 앓게 되면, 내 가족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를 끝까지 안아줄까, 아니면 나를 부담스러워할까. 이 책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리는 흔히 치매를 ‘혼자 앓는 병’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가족 전체가 함께 겪는 병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사람만큼,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도 마음속에서 무너져 내린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앨리스가 병이 깊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딸 리디아와의 장면에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도 그녀를 바라보는 앨리스의 눈빛에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끝까지 남는다. 그리고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다움을 지켜주는 마지막 끈이 아닐까.
노년에 접어든 우리는 때때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감정을 숨기고, 불편한 기색조차 내지 않으려 애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내 자세에 질문을 던졌다. 정말 중요한 건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존중받는 것이 아닐까. 존엄은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도 지켜지지만,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껴안는 것에서 더 단단해지는 법이다.
존엄은 기억 너머에도 남는다 – 끝까지 인간답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존엄’이다. 앨리스는 점점 많은 것을 잃는다. 이름을 잊고, 가족을 혼동하고, 스스로 만든 단어 테스트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살아있고, 사랑할 수 있으며, 삶의 마지막까지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나도 이제 인생의 후반부에 들어섰다. 체력은 예전 같지 않고, 단어 하나를 떠올리는 데 한참이 걸릴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혹시 내게 그런 날이 오더라도 두려움보다는 삶의 품위를 지켜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집중하려 한다.
"알츠하이머를 부탁해"는 단지 눈물 나는 소설이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바꾸게 만든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병든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점점 흐려지는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나답게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무엇보다도, 나와 함께하는 가족과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기억을 잃어도, 사랑은 남는다. 내가 잊어도, 누군가는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의 나는, 여전히 웃고 있는 한 사람이었기를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